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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걸 지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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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7일 | 끄적끄적


실험 로그 세 개와 메모 한 파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건 정답을 찾는 시간이 아니라 아닌 걸 지우는 시간이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머릿속에 새로운 설명이 추가되는 장면부터 떠오른다. 나도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알고, 더 그럴듯한 문장을 붙일수록 이해가 깊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돌아보면, 새로운 설명 하나가 들어왔을 때보다 이미 붙잡고 있던 틀린 가능성 몇 개가 빠졌을 때가 더 많았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새로 아는 것은 쉽게 기록하면서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은 자주 흘려보낸다. 그런데 연구나 개발에서는 이 두 번째 쪽이 꽤 중요하다. 이 가설은 지금 문제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 숫자는 보기엔 커 보여도 실제 변화와는 상관없었다, 이 문서는 언젠가 읽어야 하지만 지금 결정에는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런 문장들이 쌓일수록 작업은 더 가벼워진다. 나는 요즘 이해가 채워지는 과정이라기보다, 잘못 붙은 설명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1. 이해는 더하는 일 같지만, 실제로는 빼는 일이 자주 섞여 있다

처음 뭔가를 읽거나 실험할 때는 가능성이 한꺼번에 많아진다. 원인이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고, 중요한 지표가 무엇인지도 아직 흐리고, 어디까지가 핵심이고 어디부터가 주변인지도 잘 안 잡힌다. 그 상태에서는 머릿속이 풍성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 움직임이 느려진 상태에 더 가깝다. 나는 예전에는 그 순간을 공부가 잘 되고 있는 장면으로 착각했다. 재료가 많으니 곧 답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결국 도움이 되는 건 모든 가능성을 오래 품는 일이 아니라, 몇 개를 조용히 지워내는 일이다. 이건 이번 실험의 병목이 아니고, 이건 아직 볼 단계가 아니고, 이건 설명은 멋있지만 내 데이터에는 바로 안 붙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하나씩 빠지고 나면 남는 건 의외로 소박하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제 조금 알겠다"는 감각이 생긴다. 더 많은 설명을 얻어서가 아니라, 덜 들고 가도 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 무엇이 맞는지 찾는 일
  • 무엇이 아닌지 지우는 일
  • 무엇을 아직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지 미루는 일

나는 요즘 이 셋이 같이 있어야 일이 앞으로 간다고 느낀다. 첫 번째만 있으면 늘 더 찾아야 할 것 같고, 두 번째가 들어오면 비로소 시야가 좁아지며, 세 번째가 붙어야 오늘 할 일이 사람 크기로 줄어든다.

2. 실험이 풀리는 순간에는 정답보다 탈락표가 먼저 생길 때가 많다

실험 로그를 오래 보다 보면 묘하게 비슷한 순간이 있다. 성능이 왜 흔들리는지 정확한 설명은 아직 없는데, 적어도 이번에는 이 때문은 아니라는 근거가 먼저 쌓이는 순간이다. 시드를 바꿔도 같은 패턴이 나오면 데이터 한 번의 우연으로만 보긴 어렵고, 특정 피처를 빼도 차이가 유지되면 그 축이 핵심 병목은 아닐 수 있다. 이렇게 하나씩 지우다 보면 처음에는 막연했던 문제의 모양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재미있는 건 이 과정이 겉으로 보기엔 소극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뭔가를 새로 발견했다기보다, 아닌 것만 적고 있으니 진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아닌 걸 확실히 지우는 메모는 다음 실험을 훨씬 짧게 만든다. 이미 버려도 되는 가설을 다시 들고 오지 않게 해주고, 괜히 비슷한 우회를 반복하지 않게 막아준다. 나는 연구에서도 개발에서도 이런 탈락표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일수록 더 그렇다. 머리가 맑은 날에는 열린 가능성을 조금 오래 들고 있어도 버틸 수 있지만, 피곤한 날에는 그 열린 가지들이 전부 부담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는 멋진 설명을 추가하려 하기보다 지워도 되는 가지부터 정리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똑똑해져서가 아니라 짐이 줄어서 다시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3. 읽기에서도 필요한 건 더 많은 밑줄보다 "지금은 아님"이라는 문장일 때가 있다

논문이나 문서를 읽을 때도 비슷하다. 밑줄은 잔뜩 쳐뒀는데 막상 다음 행동은 안 나오는 날이 있다. 그럴 때 돌아보면 중요한 문장을 못 읽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 문제와 직접 붙지 않는 문장들까지 전부 같은 무게로 들고 있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좋은 내용은 많고, 나중에 다시 볼 이유도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다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현재 작업은 흐려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읽다가 애매하면 이해한 문장보다 제외한 문장을 같이 남기려 한다. 이 섹션은 지금 결정과 직접 연결되지 않음, 이 정의는 나중에 다시 보면 됨, 이 비교는 흥미롭지만 현재 구현에는 영향이 적음 같은 식이다. 이런 한 줄이 붙으면 묘하게 미련이 줄어든다. 괜히 건너뛴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뒤로 미뤘다는 표시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차이가 꽤 크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이런 메모를 남기면 내가 덜 성실해 보이는 것 같았다. 다 읽지 않았고, 다 소화하지 않았다는 표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본다. 모든 문장을 다 붙들어안는 태도보다, 지금 작업과 연결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태도가 더 성실할 때가 많다. 결국 중요한 건 많이 읽은 사람처럼 보이는 일이 아니라, 다음 판단을 덜 흐리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4. 아닌 걸 지운 기록은 생각보다 자존심도 덜 소모하게 만든다

나는 한동안 틀린 가설이나 빗나간 해석을 빨리 지우는 걸 약간의 패배처럼 느꼈다. 시간도 들였고, 그럴듯하게 믿었던 설명이었으니 괜히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완전히 버리기보다 옆에 오래 붙여두는 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상태가 길어질수록 생각은 더 탁해졌다. 이미 힘을 준 설명이라서 쉽게 놓지 못하고, 그렇다고 확신도 못 하는 애매한 상태가 계속 남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의외로 아주 담백한 문장이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지금 볼 문제가 아니다, 이건 다음 루프에서 다시 확인하면 된다. 이렇게 적어두면 이상하게 감정이 조금 빠진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틀림을 다음 행동으로 바꿨다는 점이 더 중요해진다. 연구를 하다 보면 맞힌 것만큼 버린 것도 남아야 하는데, 나는 요즘 이 기록이 없으면 괜히 같은 자존심을 여러 번 쓰게 된다고 느낀다.

아마 그래서 어떤 날의 진전은 새 설명을 얻은 양보다, 불필요한 고집을 몇 개 내려놓았는지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웠다고 해서 손해가 아니라, 앞으로 안 돌아가도 될 길 하나를 확보한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이런 종류의 진전을 조금 더 믿고 싶어졌다.

5. 결국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건 풍성한 가능성보다 가벼워진 판이다

작업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면, 머릿속이 대단히 풍부해졌을 때보다 판이 조금 가벼워졌을 때가 더 많았다. 이제 안 봐도 되는 것 하나, 오늘 결정과 상관없는 것 하나, 설명은 되지만 현재 증거가 약한 것 하나가 빠지면 이상하게 손이 다시 움직인다. 문제를 완전히 푼 건 아닌데도 다음 한 걸음은 생긴다. 나는 그 장면이 꽤 현실적인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분간은 뭔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무엇을 더 채울지만 보지 않고, 무엇을 지워도 되는지도 같이 보려고 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여전히 있지만, 실제로 나를 덜 헤매게 만드는 건 종종 이 두 번째 쪽이었다. 이해는 늘 축적처럼만 보이지만, 실제 일에서는 삭제와 보류가 섞여야 형태가 나온다.

어쩌면 일의 진도는 새로 얻은 답의 개수보다, 다시 보지 않아도 되는 후보가 몇 개 생겼는지로 재는 편이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메모가 길어지는 날보다, 메모 한쪽에 여기서 더 보지 않아도 됨 같은 문장이 붙는 날에 훨씬 안도한다. 그 한 줄이 있어야 다음의 내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미련을 반복하지 않는다. 축적은 늘 더 쌓는 방향으로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이렇게 버려도 되는 것을 명확히 적어두는 쪽에서도 꽤 많이 생긴다.

오늘 남기고 싶은 것도 결국 이 정도다. 진도가 안 나가는 날에는 더 좋은 설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지워지지 않은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요즘의 나는 정답을 더 빨리 붙잡는 사람보다, 아닌 걸 조금 더 담담하게 지워내는 사람 쪽을 닮고 싶다. 생각보다 많은 날의 진전은 추가된 지식보다 정리된 오해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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