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0일 | 끄적끄적
논문 PDF 한 장, 실험 노트 세 줄, 탭 여섯 개. 이 정도면 뭔가 다음 행동이 나올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같은 문단만 다시 읽는 순간이 있다. 나는 한동안 이런 장면을 전부 이해가 덜 된 상태라고 불렀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말은 너무 커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종류로 막혔는지를 구분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연구를 하든 개발을 하든 손이 멈추는 순간은 자주 온다. 식의 뜻이 비어 있어서 멈출 때도 있고, 두 방법의 차이를 말로 못 가르겠어서 멈출 때도 있고, 읽은 내용을 지금 실험 조건에 어떻게 붙일지 안 보여서 멈출 때도 있다. 문제는 이 셋이 전혀 다른 종류의 막힘인데도, 메모에는 종종 전부 더 읽기로만 남는다는 점이다. 나는 요즘 오히려 답을 빨리 적는 일보다, 막힘의 종류를 먼저 나눠 적는 일이 더 자주 필요하다고 느낀다.
1. 모른다는 말이 너무 넓을 때
"모른다"는 말은 편하다.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처음 보는 개념 앞에서는 더 읽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말은 너무 넓어서, 다음 행동을 거의 정해주지 못한다. 용어 자체가 비어 있는 상황과, 개념은 아는데 무엇이 갈림점인지 흐린 상황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읽은 내용을 지금 코드나 실험 설정에 못 붙이는 상황도 또 다르다. 셋을 한 단어로 묶어버리면 결국 전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방향은 대개 불필요하게 넓다.
나는 예전에는 이런 넓은 메모를 꽤 많이 남겼다. 이해 더 필요, 다시 읽기, 비교 더 해보기 같은 문장들이다. 그 순간에는 무언가를 남긴 것 같았지만, 다음 날 다시 열어보면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문장들은 내가 얼마나 막막했는지는 보여줘도, 어디에서 막혔는지는 거의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처음부터 읽고, 다시 비슷한 검색을 하고, 다시 같은 문단에서 멈추는 일이 반복됐다.
2. 내가 자주 적는 세 가지 막힘
- 정의 부족 — 용어, 수식, 변수, 절차 자체의 뜻이 아직 비어 있는 상태
- 구분 부족 — 각각은 얼추 알겠는데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지 흐린 상태
- 연결 부족 — 읽은 내용을 현재 문제, 실험, 구현 조건에 어떻게 붙일지 안 보이는 상태
이 셋은 이름만 붙여도 다음 행동이 꽤 달라진다. 정의 부족이면 그 부분만 다시 보면 된다. 구분 부족이면 비교 축을 먼저 적어야 한다. 연결 부족이면 지금 내가 풀려는 문제를 한 줄로 다시 써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엄청 정교한 분류 체계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냥 지금 어떤 종류로 멈췄는지를 넓지 않게 부르는 것만으로도, 쓸데없이 넓은 재독과 검색이 많이 줄어든다.
특히 구분 부족과 연결 부족은 생각보다 자주 섞여 보인다. 문장을 읽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은데 막상 선택이나 구현으로 넘어가면 손이 안 움직이는 경우가 그렇다. 예전의 나는 이럴 때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더 늘렸다. 지금은 먼저 둘 중 어느 쪽인지 적어본다. 비교 기준이 없는 건지, 현재 조건에 못 붙이는 건지. 이 한 줄이 생기면 읽어야 할 범위가 갑자기 훨씬 작아진다.
3. 설명보다 재진입 표식으로 남는 메모
메모를 다시 열어볼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건 잘 정리된 설명보다, 의외로 투박한 분류 문장일 때가 많다. 멋지게 요약된 문장은 그날의 이해를 정리해 주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게 해주지는 못할 때가 있다. 반대로 "개념은 읽었는데 비교 축이 없음", "결론은 알겠는데 현재 데이터 조건에 못 붙임", "용어 정의를 다시 확인해야 함" 같은 문장은 다음번의 나를 바로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요즘 이 차이를 꽤 크게 느낀다.
재진입이 느린 날일수록 더 그렇다. 피곤한 날에는 좋은 요약보다 어디서 왜 멈췄는지가 먼저 필요하다. 그 문장이 있어야 다시 같은 벽 앞에 섰을 때 당황이 조금 줄어든다. 멈춘 이유가 정의 부족이면 해당 절만 다시 보면 되고, 구분 부족이면 비교표를 만들면 되고, 연결 부족이면 현재 문제의 입력과 출력부터 다시 쓰면 된다. 답은 아직 없어도, 적어도 시작점은 생긴다.
- 정의 부족: 이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포함하는지 다시 확인
- 구분 부족: 두 방법을 가르는 기준 문장을 먼저 적기
- 연결 부족: 지금 내 데이터와 목표에서 어떤 자리에 쓰일지 다시 적기
이런 메모는 보기에는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꽤 친절하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한테 "여기서 막힌 이유는 이것"이라고 범위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긴 설명이 남은 메모보다 이런 짧은 표식이 남은 메모에서 더 자주 도움을 받는다.
4.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건 무지가 아니라 넓은 막막함일 때가 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어설프게 많이 알고 있어서 문제의 종류를 못 나누는 상태가 더 오래 가는 날이 있다. 얼핏 보면 자료도 읽었고 관련어도 익숙한데, 막상 다음 행동만 안 나오는 상태다. 나는 이런 날을 예전에는 집중력 문제로만 읽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더 정확한 표현은 막막함의 폭이 너무 넓은 상태에 가까웠다. 그 넓이를 줄이지 않으면 정보는 더 들어와도 손은 잘 안 움직인다.
그래서 막힘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똑똑해 보이기 위한 정리 습관이라기보다, 일을 사람 크기로 줄이는 장치에 가깝다. 정의 부족이면 자료를 좁게 다시 읽으면 되고, 구분 부족이면 비교 기준 둘만 먼저 적으면 되고, 연결 부족이면 내 문제를 다시 써보면 된다. 이 정도만 해도 이상하게 자존심이 덜 든다. 막연히 못하고 있다는 기분 대신, 지금 필요한 행동이 작은 단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5. 답이 없는 날 먼저 적어두는 한 줄
나는 이제 손이 멈추면 더 읽기 전에 한 줄부터 적어보려 한다. 지금 비어 있는 게 정의인지, 구분인지, 연결인지. 셋 중 하나만 붙어도 다음 행동은 훨씬 짧아진다. 이 메모가 대단한 통찰을 주는 건 아니다. 다만 막막함을 조금 덜 넓게 만들고, 같은 문단을 세 번 읽은 뒤에도 제자리인 시간을 줄여준다.
다음에도 아마 논문 PDF 한 장과 탭 여섯 개 앞에서 또 멈출 것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그냥 이해가 부족하다고만 적어두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정답을 빨리 내는 사람보다, 막힌 이유를 조금 더 정확히 부르는 사람 쪽이 실제로 더 오래 간다고 느낀다. 결국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건 대단한 결론이 아니라, 왜 여기서 멈췄는지 좁게 적힌 한 줄일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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